'종교와 문화' 강의를 듣고
향 림
처음에는 낯설기도 하고 수련인에게 있어서 왠지 거리가 먼듯하게 느껴졌던 엄청난(?)주제로 해서 막막하고 지루할 것이라 짐작되었던 강의는 거듭될수록 모두의 열기를 끌어내면서 강의가 끝나면 벌써 다음 주가 기다려지게 되고, 우리 모두는 강의 속에서 자신의 사유체계를 차분하게 되돌아볼 수 있었고 새롭게 이어지는 소주제들과 친숙해지려고 애쓰면서 저마다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갔던 것 같았다.
이제 그 세 번째인 종교성과 관련된 인류문화사의 긴 여정의 끝자락에 대한 마지막 강의는 학생들의 기대와 아쉬움을 잔뜩 담은 채 수련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온 산과들이 푸르러 오름을 알리는 뻐꾸기 노래를 배경삼아 펼쳐졌다.
교수님은 질병과 치유라는 주제에 접근하기에 앞서서 고통이라는 문제, 질병과 치유도 그의 일부일 듯 한 고통이라는 문제로 강의의 문을 여셨다.
고통이란 뭐고 어떤 특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고통은 뭔가 아프다는 것인데 일반적인 고통도 정신적인 고통도 누구나 갖고 있는 몸 자체인 신체적인 고통에 대한 느낌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고 그래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고 누구도 감각적으로 다 체험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고통을 겪어야하는 사람한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고통과 화해하여 긍정적으로 삶을 살아나갈 수 있게 하는 설명은 대개의 경우 물리적인 설명만을 넘어서 어떤 종교적인 설명체계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경우 기계는 낡게 마련이고 모든 생명체에는 죽음이 있게 마련이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고 하는 것을 이해시킴으로써 자기한테 벌어지는 모든 한계상황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측면이 있는 것 같고 또 신약성서에 예수님은 신체적, 정신적인 질병을 앓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모습을 수없이 보이신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부터 종교는 고통과 굉장히 깊은 관계를 갖고 있고 그 중에서도 질병과 치유라는 문제하고 깊은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신다.
희랍어의 holos는 전체라는 뜻인데 이것에서 건강하다의 healthy와 신성하고 거룩하다의 holy가 파생되었다 하신다. 그러니까 거룩한 것과 신성한 것과 건강한 것은 같은 어원을 가졌다는 이야기이고 아주 건강한 몸은 성스러울 수가 있으며 특히 그 얘기는 도교전통에선 완벽하게 들어맞는다는 말씀이다. 이런걸 보면 근원적으로 온전한 것은 성스러운 것이고 건강한 것이고 그래서 종교와 질병은 이런 의미에서도 깊은 관련성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신다.
교수님은 본 주제를 강설하기에 앞서 지난 시간 최동춘 법사님께서 하셨던 영에 대한 질문에 답한 것 중 잘못된 부분을 수정함으로써 학자적 ‘철저함’과 수양적 ‘자기비움’이 조화된 切磋의 아름다움을 엿보게 하였다.
靈 이라는 글자를 사전에 찾아보면 巫, 神靈 등이 있는데 神은 항상 양에 배당이 돼서 靈도 양이라고 대답했는데 두 개의 문헌에서 오히려 영이 양이 아니라 음에 배당된 것을 발견하셨다 한다. 혼백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음양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단독적으로 영에 대해서는 음이다 양이다라고 묘사하는 글들이 별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음에 배당되는 용례가 보인다는 것이다.
덧붙여서 현대인들이 쓰는, 영어로 soul, 라틴어로 anima의 번역어인 영혼은 천주교 선교사인 마테오릿치가 중국에 와서 당시 각기 독자적인 영과 혼으로 쓰이던 용어를 조합해서 쓰기 시각하면서 영어개념의 soul의 뜻으로 쓰였는데 그 이전에 용례로 쓰였던 영혼이라는 것은 영이라는 게 형용사로도 많이 쓰여서 영적인 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영과 혼이 각자의 개념으로도 쓰일 수도 있어서 현대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는 고전용례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精과神, 鬼와神 등에서처럼 각각 다른 용어였지만 후대에 이르면서 점차 복합어로 쓰인 경우라 하신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영혼이라는 것이 종교적 전통에서 질병과 치유라고 하는 주제와 관련이 매우 깊다는 것이다.
세계종교전통의 경우는 구별은 가능하지만 나눌 수 없는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만을 상정하기보다는 이 둘을 소통시켜주는 제3의 원리를 상정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고 그것이 바로 영혼이라고 하신다. 따라서 종교전통에서 다루는 질병은 영혼의 질병이라는 것이다. 컨셔스니스니 마인드니 이런 용어를 써서 구별을 할 수가 없으니까 보다 깊은 차원의, 이 육체와 정신을 소통시켜줄 수 있는 제3의 원리로서의 영혼의 존재를 설정하는 것이 아주 보편적으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에서 치유하겠다고 하는 질병은 단순히 마음이 바르지 않다든가 심술이 바르지 않다든가 아니면 다리가 부러졌을 때라든가가 아니라 근원적인 질병의 원인이 영혼에서 기인했을 경우에 무희들이 달려들 수 있다는 것이다. 무당들이 아무 병이나 다 고치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영역과 의사가 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구분을 분명히 한다는 것이다. 이 영혼이 온전했을 때 그 사람은 성스러울 수 있는 거고 근원적으로 건강할 수가 있는 거라는 것이다. 이런 도식을 갖고 도교전통에 적용해보면 도교에서는 대체적으로 질병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얼른 알 수가 있을 거라신다.
도교의 경우는 아득한 옛날 어떠한 인위적인 가공도 가해지지 않는 원초적인 상태가 가장 완전한 상태, 위에서 말한 holos라고 하는 상태였다고 가정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태어나면서 애초의 그런 순수성이, 육체의 순수성도 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역사가 진행될수록 문명이 진행될수록 본래적인 원초적인 그 자연의 완벽함이 훼손되어나간다는 것이 도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사들은 개인적으로 정말 죽음에 가까운 수련을 통해서 우주적인 파워를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질병이라는 현상은 늘 있고 사람들은 그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고, 보다 잘 살고 싶고 하는 욕구를 절대자라든지 절대적인 상징물이라든지 하는 것에 희구하게 된다. 물론 그게 외부의 시선에서 볼 때는 기복행위이지만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아주 절실한 종교적인 희구인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 질병을 마냥 앓고자 하지 않고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고 따라서 그 질병을 치유하는 테크닉을 익힌 부류들이 생겨나고 그 테크닉을 익힌 부류들은 대개의 경우 인류문명의 초기단계에서는 무당이자 의사였을 거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의사는 몸의 건강을, 무 과거의 샤먼이 담당했었던 역할은 지금의 사제계급에서 담당하는 분업화의 길을 걸어왔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위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어원이 동일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巫醫의 역할을 했었던 사람들은 이 지상계와 천상계의 통로를 아는 사람들 또 신체와 정신의 통로를 아는 사람들이고 그것을 건전하게 유통시킴으로서 본래적인 신성함, 본래적인 거룩함, 본래적인 온전함, 본래적인 건강함을 되찾아 줄 수 있는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인류가 가져왔었던 문화체계로서의 종교가 왜 그렇게 질병을 중요하게 다루고 왜 그런 세계 종교의 영적인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신체에 대한 치유능력도 보유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치유라는 것도 면허를 갖고 있는 의사들이 하는 것의 cure라는 의미와 대체의학하시는 분들이나 명상치유하시는 분들이 할 수 있는 healing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큐어를 힐링까지 넓혀서 본다면 치유라는 것은 전 세계를 통해서 종교적 경험에서 굉장히 중요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종교전통에서도 대개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나 인물이 바로 치유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고타마싯타르타 자신이 위대한 치유자라 불렸었고 또 다양한 치유행위가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도 예수는 믿음만 있으면 정말로 그렇게 낫게끔 해주는 여러 가지 기적적인 치유를 한 사례가 실려 있다. 또 조로아스터교의 시조에 의해서 교시된 계시에 의하면 인류는 병의 형태로 존재하는 악을 물리치고 세상을 본래적인 온전함의 형태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신성한 치료의 기술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구약의 경우에 신 자신의 음성으로 ‘나는 곧 주이고 너의 의사이다’라고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치유자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은 그 치유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깊은 상처를 받고 거의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이겨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선택을 스스로 했건 안했건 간에 어떤 굉장한 고통에 시달리고 나서야 비로소 신의 뜻을 깨닫는다든지 우주의 이법을 깨닫는다든지 하면서 그 근원적인 치유의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병과 치유의 기원으로 눈을 돌려보라신다.
과연 질병의 원인이 근원적으로는 어디에 있고 완전한 치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런 것은 수치로 측량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관념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질병에 대한 견해도 서양의사와 한의사들의 견해가 다르고 뭐가 건강에 좋은 음식이냐에 대한 견해도 각 종교전통마다 다르다. 더욱이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의 신념체계는 과학자들이 하는 얘기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도 상대적이라서 기원에 대한 인식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이해가 있을 뿐이어서 신화적으로 교리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곧 하느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하는 식으로. 그게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질병의 등장과 명명자체는 사회적으로 하나의 문화코드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 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고 그래서 바람직한 삶의 양태는 무엇이고 따라서 교육은 어떤 식으로 재배치할 수 있고 하는 식으로 또 다시 문화가 재배열 된다는 것이다.
병을 진단하는데 있어서 중국의료의 여러 분야에서 이론적인 근거가 되는, 포르케라고하는 중국학자가 요약한 종교적우주론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 연결시키는 원인이 되는 근본적인 힘과 함께 계절, 별자리, 낮과 밤, 남녀 또 다양한 문제들의 기본요인이라든가 중요한 방위, 우주의 밑바닥과 꼭대기, 천정을 검사함으로써 병을 진단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사주가 음양오행의 기운을 다 띠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음양오행 가운데 어떤 기운이 없는지 혹은 어떤 기운만 너무 강한지 이런 것들이 사주만 들으면 분간이 돼서 똑같은 증상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이한 치료방법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서양의학에서는 그런 게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서양의학체계에서는 포르케라고 하는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은 다만 중국의료의 여러 분야에서 우주론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진단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그런 의료체계, 의료에 대한 관념체계를 말하는 것이라 본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교수님은 조심스럽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셨다. 이 우주만물은 근원적인 동일한 본질인 하나의 氣로 이루어져 있고 그리고 이 우주의 변화는 우주 내부의 음양의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고 믿느냐는 것이었다.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을 하느냐고... 덧붙여서 陰陽五行說이라든가 氣一元論이라든가 精氣神의 理論이라든가 하는 이런 것들은 신념체계(belief system) 아니면 가설적인 이론의 틀로 보기를 제안하셨다.
이러한 것들은 한자 문화권의 사회에서는, 중국의 전한시대 이래로 청대까지 1911년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과거시험에서 정답으로 받아들여진 체계로써 이제는 거의 예외적인 것이고 지금은 부분적으로나마 전통적인 세계관의 유용성을 믿는 분들이 이런 틀들을 그냥 받아들이고 있는 정도라는 것이다.
교수님은 심지어 이 우주가 혼돈이라고 하는 원초적인 氣의 덩어리로부터 무거운 것은 아래로 가라안고 가벼운 것은 위로 뜨고 그래서 하늘과 땅이 형성이 되고 천의 기운과 땅의 기운 가운데 가장 정묘한 것 중의 정묘한 것이 모여 인간을 이루었고 하는 식으로 우주만물의 형성을 이야기하는 중국적인 기일원론은 근본적으로 신화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도교의 신념을 갖고 있는 일부사람들은 그것이 진리라고 받아들일 것 같다 하신다.
그렇지만 이것은 기독교 신자들이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셨고 하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글자 그대로 다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 아니면 어떤 사람들은 상징적인 은유라고 받아들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실은 예전에 그랬지만 지금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지금은 빅뱅이론을 믿어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수련에 관련된 논문들이라든지 특히 체육교육학과 스포츠의학과 이런데서 나오는 논문들 특히 한의학과에서 나오는 논문들 가운데 때로는 저런 것들을 그냥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면서 전개하는 글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학이론을 전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는 것이다.
원래 우주의 근본적인 그런 원리는 오행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돌아가는 게 아니냐 그냥 이렇게 받아들이면 모든 게 다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은 서구문명과의 만남 때문에 한의학의 위치가 모호해졌다 하신다. 그 이전에는 실제로 뜸뜨고 약 좀 먹고 이렇게 해서 안 고쳐지면 죽는 사람은 죽는 것이고 지금도 수술 받다가 죽는 사람도 있지 않느냐 하신다. 예전에는 그게 정말 의료인줄 알고 살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의학체계를 만나면서 이것이 의학인가, 참된 과학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 거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의학이 기본으로 깔고 있는 설명체계중의 하나가 음양호행설이고 그런 것 때문에 한의학이 요즘은 자꾸만 증상별 연구로 갈려고 한다든지 약초에 대한 것도 성분분석을 하려고 그런다든지 하는 식의 접근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런 틀을 그냥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쓰는 글들, 그런 경우에는 하나의 체계, 이론틀을 진실이다라고 받아들이는 종교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는 것이다.
줄곧 그러하셨지만 이 대목에서도 학장님께서는 우리가 놓칠 지도 모르는 중심적인 맥락을 살며서 높이들어올려 학생 모두가 확실하게 공유하고 그것을 토대로 창조적인 고민을 하게끔 하는 그런 자상한 배려를 빠뜨리지 않으셨다. 곧 이런 것들은 가설이기 때문에 자기가 그 신념을 믿어서 성취하는 것은 주관적이지만 객관적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일 텐데 만약 쓴다고 한다면 가령 국선도 이론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음양오행설에 의하면 국선도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한 학생이 국선도 책이 음양오행설에 입각해서 지었기 때문에 국선도를 하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믿을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반문이 제기가 되면서 교수님의 부연설명이 이어졌다.
교수님은 음양설과 오행설은 그 기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음양이라고 하는 용어가 계속해서 음과 양을 논하는 그런 문헌에서 쓰였고 오행은 오행이라는 말보다는 수화목금토라고 하는 그런, 어떤 때는 수화목금토에 氣라는 것도 더 들어가기도 해서 어떤 것은 6氣說을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오행이 아니라 육행, 육기.
그리고 이 행이라는 것도 어떤 경우에는 기라고 표현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물질이다라고 표현되기도 하고 그러니까 복잡한 음양설과 오행설의 역사적 근원을 떠져보면 각자 다른 원리를 가진 다양한 용례들이 발견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느 시점에서, 대체적으로 전국시대 말경에 슬그머니 결합을 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으로는 제나라 강사인 추연이 음양설과 오행설을 결합시켰다고 하는데 교수님이 추연에 대한 자료를 다 읽어봤지만 결합시킨 예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듯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언제 어떻게 결합됐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전한시대가 되니까 많은 사람들이 음양과 오행을 결부시켜서 이야기하는 문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 이후에 음양오행설은 그냥 애초에 붙어있는 한 덩어리인 이론체계인 것처럼 생각되면서 여러 가지 술수학, 의학, 무술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응용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음양설과 오행설을 결합시키는 원리에 대해서도 한 가지가 아니고 따라서 그 결합시키는 양태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이때 학장님은 다시 명료하게 가름질을 하신다.
지금껏 우리가 설명해오던 방식이 사실은 고착화돼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스스로 해야 되고, 그렇다고 이것을 제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병행해서 다른 방법으로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을 창조하고 조합해내는 의무가 우리들에게 있음을 가리켜주셨다.
교수님은 한의학이라든지 명상기술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바로 이런 가설의 틀을 어떻게 보다 효과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야 된다고 하신다.
음양오행이 진리여서가 아니라 기존의 문화에 있었던 현상들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굉장히 효과적으로 기능을 했기 때문에 이천년 동안 사용되었던 도구라는 것이다.
정말로 이모든 것은 기로 이루어져 있고 이 우주 만사만물은 음양오행의 원리에 의해 전개되고 있고 결국은 그 상생상극의 원리에 의해서 돌아갈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 신념체계, 이론체계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그런 종교인의 자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독실한 기독교신자라고 해서 다른 설명체계를 다 배제해야 되는 것은 아니고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이론체계를 보다 면밀히 검토해본다든가 그것을 한 번 더 현대의 용어로 객관화시켜 본다든가 하는 그런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라 하신다.
우리가 사물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바라보고 있는 높낮이에서 사실을 말하고 있는 다양한 견해의 수용이 필수적인 조건이 되고 종교적인 시각이라는 것도 그 중의 하나라 하신다.
끝으로 도교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도교는 기본적으로 병의 원인을 기의 부조화로 인해서라고 하며 원초적이고 온전하고 순수한 상태가 이미 태어나면서 깨지고 역사가 진행되면서 깨어지기 때문에 원초적인 건전하고 순수한 상태로 되돌려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그 되돌릴 수 있는 테크닉을 개발해 왔다는 것이다. 특히 내단술의 목적은 몸을 가장 순수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 한다.
도교도 여러분파가 있는데 내단이론의 원형을 제공하고 있는 항청파라고 하는 파는 인간은 신체내부에 내장을 관장하는 신 즉 내장신 또는 체내신이라는 것이 있고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체내신이 거주하여 올바로 기능한다고 하여 몸을 신성하게 다루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파의 체내신에 대한 사고는 송대에 유불도 3교가 융합하게되는 사회기류를 타고 신도교가 성립되면서 점차 배제되어갔다는 것이다.
북종의 전진교, 남종의 정일교라기도 하고 천사교라기도 하는 신도교의 그러한 체계에서는 불교식의 청정한 생활이라든가 구체적인 명상테크닉 같은 것도 수렴을 하고 유교의 충효에 대한 도덕적인 덕목이라든지 하는 것도 수렴을 해 간다는 것이다.
이3교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불교의 청정계율이라든가 가족윤리 같은 것 때문에 도교의 중요한 분파인 방중술파는 그 입지를 잃어가며 점차 그 서적 또한 사라지게 되고 동시에 유교의 수기치인이라든가 불교의 보살도를 수렴하면서 도사의 목표도 나를 저세상에 건네고 남들도 건네는 이런 식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3교 융합기류는 불교가 전래된 후한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미 개별적으로는 활발하게 진행돼 왔고 도사들 가운데 유교, 불교를 다 섭렵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신도교의 3교융합사상의 성립과 전개과정에 대한 강의는 내게 있어서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문의 해석과 최치원의 3교를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부딪쳤던 이전의 혼란을 교통정리해주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 최치원이 “불교와 유교를 발달시키고 上古之風을 잘 일으켜 大同의 敎化를 이루어서 동물까지 포함한 一切衆生을 모두 解脫케 해야 된다” 고 역설한 것이나 “유교, 불교가 비록 출발은 다르다 하지라도 돌아가는 바는 하나”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문헌들을 보면서 그가 유교와 불교, 上古之風의 병행론을 펼쳤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객관적인 시야를 견지하지 않으면 주관적인 오류에 빠지게 돼 많은 사람들한테서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는 평범한 상식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학장님께서는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으면서 그런 사회적 흐름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에 신라에 와서도 그러한 사유를 할 수 있었다고들 학자들은 보고 있다고 하셨다.
국선도로 돌아와서 보면 건강차원에서만 국선도가 의미가 있는지 그런 차원에서만 국선도를 이끌어가는 게 좋은지 아니면 보다 깊은 차원의 국선도만의 세계관을 이론적으로 정립해야 되는지 거기에 민족적인 색채를 어떤 식으로 가미 해야만 되는지 이러한 것들이 앞으로 여러분들이 만들어가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하는 바램을 내보이셨다.
막스웨버라고 하는 이는 모든 종교전통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사제계급과 예언자계급이라는 두 가지 로 나누었다 한다. 사제계급은 전통을 보존, 확대하는, 전통을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자꾸만 변하기 때문에 전통만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면 고인 물이 썩듯이 썩어갈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인류에게 새로운 해답기능을 못하게 돼 사회적 경험의 총체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서 전통을 고치려고 하는 예언자형의 사람들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막스웨버가 기독교에 한해서 한 얘기이지만 모든 종교적인 문화, 또 종교적이지 않은 모든 문화에도 이러한 경향은 있다고 하신다.
이전에 어떤 스님이 성직자와 선지자라는 개념으로 비슷한 설명을 하고 사회와 역사 속에서의 선지자적 역할의 중요성을 설파한 대목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이 두 유형의 역할이 적절하게 조화만 된다면 세상에 막힐 것이 없을 텐데...
끝으로 박사님께서 전체 강의의 백미라 할 만한 진지한 당부를 아끼지 않으셨다.
“ 여러분들은 국선도 문화를 펼쳐나가실 분들이잖아요? 그래서 보다 현대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도록 그러니까 자꾸만 청산선사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 현대인들한테 소통이 잘 안되잖아요. 지금 10대 아이들한테 청산선사님의 말씀을 그대로 들려주면 아마 장애가 참 많을 것 같아요. 그래서 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가려는 기초문화에 대한 이해도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기초문화에 대한 이해는 그런 현대종교학이나 문화인류학이나 뭐 이런 데서 나오는 파악된 흐름을 여러분들도 분명히 한쪽 귀는 거기에 고정을 시켜두셔야 될 것 같고 또 한 쪽 귀는 국선도 내부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열려 있어야 될 것 같아요. 그건 20세기 칼바르트라고 하는 신학자가 그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어요. ‘한손에는 성서를, 한 손에는 신문을’, 저는 국선도라고 하는 전통성을 민족성을 그 한 쪽에 가지고 있는 국선도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설득력을 가지고 유의미하게 전개되어 나가기 위해서는 칼바르트의 그런 자세, 신문과 성서, 전통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이 병행되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쏟아지는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에 이제 막 물올라오는 녹음의 내음을 싣고 간간이 들려오던 뻐꾸기 소리가 아스라이 묻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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