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문화’ 강의를 듣고서
향 림
지도사범님 왈 국선도 대학에서 외부인사를 초빙하여 실시하는 강의는 이번이 처음이란다. 그것도 종교학 관련 연구를 왕성하게 하고 계시는 분으로서 현직 유수의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양성하고 계시는 선생님으로서는.
국선도 대학에 들어오기전 수련원에서 조금 수련하면서 국선도의 문화적 성격, 사회역사적 위상, 다른 수행전통과의 상관 등 국선도에 관한 약간의 의문들이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나로서는 자못 기대가 컸다.
더욱이 일반회원들이 종교와 관련하여 국선도에 대해 물어오면 우선 회피하거나 아니면 어정쩡한 답변을 하곤 하는 지도자들의 인식의 지평에서 한 차원 넘어가, 종교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고 국선도와 어떻게 관련지울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그럼으로써 새로운 발견을 하는 계기로 삼아달라는 학장님의 당부는 내 기대를 한껏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조금은 왜소해 보이는 작은 체구임에도 안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움 속에 당당한 기운이 깃든 마른 체격의 중년 여성 한 분이 학장님과 함께 수련장에 들어섰고, 이내 학장님의 짤막한 약력소개 후, 나는 작은 문을 통해 넓은 학문의 세계로 이끌려 들어갔다.
논리적인 전개와 치밀하지만 얼마든지 열려있는 짜임새, 일방적으로 해답을 쥐어주려 하지 않고 학생 스스로 질문하고 발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수평적인 사유방식 그러나 전문가다운 체계적인 논리구성은 강의에 더욱 신뢰도를 높였던 것 같다.
게다가 일상적으로 하는 밥 먹는 행위를 놓고 그 밥 속에 깃들어 있는 거룩한 자연생명들의 합창과 인간의 신성한 노동의 결합이 빚어내는 신비한 교향악을 찬미하는 듯한 엷은 미소 속의 경건함은 일반 강의의 무미건조함을 훌쩍 넘어 나의 가슴을 강의 내내 열어젖혔다.
종교학이라는 학문적 개념틀은 인간문화를 새롭게 바라보고 이해하는 통로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에게 유용하고 특히나 우리 같은 명상이나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남과 나를 객관적으로 비추어 볼 수 있는 관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아주 유용한 것이라는 교수님의 도입부 설명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종교란 궁극적 실재와 조우한다는 종교만의 독특한 영역이 있고 각 종교는 모두다 절대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여타의 문화현상과 종교가 구별된다는 일반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현상 속에 종교적 전통 및 아이디어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 교수님의 견해였다. 전적으로 수긍이 가는 대목이었다.
각기 색다른 수련단체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단체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이나 수행전통을 절대적이라 여긴다. 그러나 모든 수행전통은 불쑥 하늘에서 신이 내려 주었거나 어느 특별히 뛰어난 천재에 의해 발명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당대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고 아울러 그 문화권의 코드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각기 절대성을 주장하는 그 전통도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위치에 서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종교적 전통 또는 수행전통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 벗어나 객관화해보는 맥락에서 놓고 보면 첫째로 세계관을 담고 있는 이론적인 틀이 있고 둘째 그 이론적 틀을 실현하는 실천적인 틀이 있을 것이고 셋째 그 실천적인 틀을 통해 얻은 복음(좋은 소식)을 나누어주는 공동체적인 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국선도를, 우리수련을 집어넣고 보면 국선도가 다른 수련 및 종교단체와 어떤 면에서 어떤 특성이 있고 어떤 장점이 있고 어떤 것이 취약한지 진단해 나갈 수 있을 거라신다. 음... 많은 아이디어를 빌려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얼른 뇌리를 스쳤다.
근대이후의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균질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인간의 구체적인 사고나 행위는 똑같은 시간 속에서 어떤 이는 길게, 어떤 이는 짧게 느끼고 동일한 자연물에도 그 이미지를 상반되게 갖는 점에서 결코 균질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인간에게도 일상적인 경험과 비일상적인 경험이 공존하고 그 경험의 깊고 얕은 것이 맞물러 섞여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체험이라는 것이 일상적인 체험과 비일상적인 체험이 있고 양자가 뒤섞여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비일상적인 경험을 엘리아데라는 종교학자는 종교적인, 성스러운 것, 즉 聖 그리고 일상적인 경험은 세속적인 俗의 영역으로 명명하고 인간은 두 개의 세계를 산다고 했으며 그러한 인간을 종교적인 인간-homo religiosus- 이라 했다. 종교적이라고 해서 특정종파에 속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일상성속에서 비일상적인 경험을 계속해서 하는 사람을 종교적인 인간이라 이름 붙였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종교적인 인간인 셈이다.
독특한 종교적 전통을 언급하지 않고서라도 아주 거룩한 체험, 아주 신성한 체험들, 일상적이지 않은 체험들을 하는 인간을 종교적 인간이라 이야기 했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비일상적인 체험들을 종교적인 문화현상이라 부르자고 했다한다.
따라서 종교학이라는 학문은 이런 종교적인 인간들의 종교적인 체험들, 문화 표현들을 연구하는 것이어서 신학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을 연구하는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이 가설을 전제로 한다면 우리가 수련 중에 겪는 일련의 체험들을 종교적인 체험 즉 종교적인 문화현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종교적이라면 기성종교 그 중 많은 부분이 기독교적인 것을 떠올리게 되고 그 외 불교, 유교 등등을 떠올리게 되어서 종교에 대한 정의가 어떠하냐에 따라 종교적 현상 안에 포함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엘리야데의 가설은 다른 어떤 종교학자의 가설보다 포괄적이고 수용의 범위가 넓고 대단히 유용해서 많은 종교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정의라 한다. 잠시 간략하게 되짚어 보자면 이런 것 같다.
인간이라면 일상성과 비일상성을 체험하고 이 일상적인 것을 俗( 나쁘다거나 천박한 것을 뜻하지 않고 단지 성스럽지 않은 일상적인 것을 뜻함), 비일상적인 것을 聖이라하고 이러한 聖과 俗의 영역 속에서 사는 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聖을 체험할 때 표현하는 여러 가지 표상물들을 종교적인 문화라고 일단 가설을 지어보고, 따라서 비일상성의 높낮이는 다르지만 그런 것들을 일단 ‘종교적’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그랬을 때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많은 문화현상이 지닌 종교성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도자로서 종교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국선도에 접목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같이하는 계기로 이용했으면 하는 학장님의 조언은 강의의 가치를 더욱 크게 했다.
교수님이 서계신 한 점으로 강의장의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진지하고 열띤 분위기로 강의는 중간에 쉬는 시간도 없이 그렇게 두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고 급기야 강의일정시간상 30여분 남겨놓고 휴식을 취했는데 그것도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상호긴밀한 소통시간으로 채워졌다.
아울러 몇몇 도우님들의 폭넓고 예리한 질문은 양방흐름의 강의수준을 한층 높여 주었던 것 같다..
한편 비일상적, 종교적, 혹은 신비한 정신적 체험은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위험성이 뒤따르고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자기 체험마저도 객관화 하려는 노력, 습관의 배양은 정말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기체험의 절대성에서 시각을 열어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다른 문화권에도 유사한 것들이 많이 있는 걸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수행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심신의 건강을 얻을 수 있는 걸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자기단체의, 자기종교의 주관적 체험을 일반화시켜 상대를 평가 절하하는 위험 때문에 수련자체나 종교자체가 비난받고 발전이 안 되는 현실을 볼 때 곰곰이 되새겨 볼 만한 일이다.
더욱이 국선도 지도자로서 인간의 문화가 국선도의 원리체계처럼 구성된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체계도 저마다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야 사회 속에서 다른 수행전통을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문화적 다원주의에 힘입어 21세기의 최대의 과제인 평화와 공존이라는 인류의 희망을 실현하는데 조금은 기여할 수 있으리라 본다.
현대의 종교문화가 가지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기존의 기성 종교문화의 특성을 표현해주는 맥락을 벗어나려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도이지만 초기독교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거, 기독교인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러한 영성을 추구하고, 불교도끼리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대화에 참여할 수 있고 같이 실천해낼 수 있다는 그런 영성을 창조하는 일에 현재의 인류가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는 교수님의 마무리는 가히 강의의 백미였다.
그랬을 때 남는 텍스트가 몸이고 몸을 통해 구체적으로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거, 예전에 어떤 문화권 속에서 태어나면 하늘나라에 가고 헌금을 꼬박 꼬박내면 뭐가 보장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수련이라든지 자기 몸으로 하는 명상이라든지 이러한 것에 많은 사람들이 경도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명상센터에 기독교인, 불교도인 등 특정 종교인만 받는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이번 강의는 종교라고 하는 것을 새로운 각도에서 살펴보게 했고 국선도뿐만 아니라 다른 수행전통들에 대해 문화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단서를 얻게 된 행운의 시간이었다.
내게 있어서도 매우 흡족한 반나절이었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간이 있게끔 해주신 학장님께도 꾸~벅...
다음은 몸에 대한 것과 호흡 일반, 호흡이 어떻게 종교적으로 이해되고, 이용되어 왔는가의 주제로 접근하신단다.
그 다음은 치유라고 하는 것과 명상일반에 대한 종교학적 이해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 하신다.
이번 첫 강의를 통해 얻은 혼돈의 가지런한 정돈과 기존관념의 건설적인 해체의 기쁨은 다음 강의에 대한 더 큰 기대로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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