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인생을 평화와 조화가 함께 하는 전체로 여기십시오. 생존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또,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나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만이 평화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목적을 무시하고 오직 이기적인 씨앗만 뿌렸다면 당신은 무엇을 수확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두어야 합니다. 확실히 인생에는 밀물과 썰물과 같은 기복이 있습니다. 어두운 시절도 있고 햇빛이 가득한 시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적 목적을 지니고 있는 영적 실체는 평화의 안식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뿌린 것이 이상이라면 당신은 일상의 경험 속에서 그 이상을 수확하게 될 겁니다.
이상이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영혼은 자기 내부에 현현한 신과 자신이 공동 창조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선택이 실체를 이기적인 우쭐함으로 이끈다면 결국은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 것 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창조력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라면, 육체와 마음은 평화와 조화 그리고 그 영혼이 물질적 경험의 세계로 들어온 참다운 목적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동기에 주의할 때만 평화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말이다. 즉 우리의 행동이 내부의 창조력과 다시 하나가 되고자 하는 바램에 의해 인도되어야만 하며, 그 창조력이 의지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과 자신의 능력을 신에게 헌신하면 그속에서 평화와 기쁨을 얻게 됩니다.
영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평화와 조화를 얻는 데 지름길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른 삶 속에서 그것들을 구하십시오. 우리는 자신의 양심을 거스를 수 없으며, 자기 자신과 가정과 이웃과 신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케이시가 주장한 기본적 원리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우리 각자는 창조력이 현상계(물질계)에서 물질적 형태로 구현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역시 신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에게 베푸는 지극히 작은 것일지라도 그것이 바로 창조주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하찮게 대접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을 그렇게 대접한다는 의미입니다. 케이시는 이럴 경우 우리 양심은 결코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타인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라.
만일 우리가 평화롭고 싶다면, 먼저 타인을 평화롭게 해주어야 합니다. 만일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자신이 먼저 친절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만일 사랑받고 싶다면, 먼저 사랑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케이시는 사랑스러운 사람 뿐만 아니라, 적이나 우리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까지 사랑을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자신의 행복과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노력이다.
우리는 인간이 되면 족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대단히 큰 위안이 된다. 나는 분노, 시기. 증오를 느끼지 않는 상태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자신이 완전해 지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런 감정이 현실임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은 이런 감정들이 실재함을 자각하고, 그것들과 반대의 감정인 용서, 사랑, 돌봄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영혼의 발전에 기여합니다. 비록 영혼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겠지만, 그런 고난들이 평화와 기쁨과 조화를 가져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미움과 원한과 다툼의 반대되는 것들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