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와 종교

수행의 요체-허해구

한빛담아 2014. 5. 6. 00:29

수행의 요체|******&깨달음의 길

晸印(오세홍) | 조회 10 |추천 0 |2013.07.21. 17:40 http://cafe.daum.net/yukummunhwa/MUeW/83 

 

 

해탈은 마음의 결실이고 마음은 삶의 결과로 나타나니

가만히 앉아 지은 것이 없는데 어찌 마음이 영글기를 바라겠습니까?

마음의 결실을 원하고자 한다면 열심히 마음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의 인연을 만나야 합니다.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의 빛을 전한 후 수천년동안

수많은 수행자들이 황야 또는 깊은 산 속에서 구도의 열정으로 인생을 바쳤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안타까움 속에서 생을 마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참된 진리의 인연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진실을 보는 자를 만나면 같이 세상을 분명하게 보는 것이며

관념 속에서 세상을 보는 거짓된 자를 만나면 흐린 세상을 보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입니다.

정등각을 얻은 부처님을 만나 부처님이 하신 깨달음의 언행을 그대로 따라했다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육친 제자들은 모두 아라한이 되고 다음 생에 부처가 될

수기를 받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인연을 만나 세상의 실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치를 깨쳐야 합니다.

 

일년간 이곳에서 열심히 글을 읽으시면 세상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옳고 그름이 보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일을 부지런히 실천하면 많은 깨우침이 올 것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중생들의 모습을 보면 마음에 애가 탈 것이고

세상에 대한 자비와 사랑에 자신의 삿됨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자신속에 요동치고 있는 사사로운 업을 극복하지 못해서

진전이 없는 것인데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모든 업을

극복해야 합니다.

 

모든 부처님이 반야로 말미암아 해탈을 얻었듯이 반야에 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업이 사라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반야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 이전의 경계로서

모든 것이 사라진 곳이기 때문에 조그마한 업이라도 남아 있으면 결코 합일하지 못합니다.

 

이 업을 지우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세상을 살아 업을 지우는 원인을 지어야 합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모든것이 공하다는 관념만 잡고 무조건 업을 잊으려고 한다면 결코 업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업은 수많은 윤회전생을 거쳐 자신이 직접지은 것들이 자신속에 들어와 있는

삶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업은 삶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땅에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하는 것이 영원한 진리인 부처님의 인과법이니

돈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뇌물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하고

색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색의 유혹에서 이겨내야 하며

나약한 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상을 위해 실천적인 용기를 내야하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이겨내지 못하면 결코 마음으로도 이겨낼 수가 없으며 업의 충동에 이끌려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과 수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리 장좌불와를 한다고 해서 지은 것이 없다면 결코 업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도 명상의 전통으로 인하여 불교에서는 명상수행을 수행의 본질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상은 삶의 본질이 아니라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삶을 살기 위해 나온 것이지 명상을 하러 나온 것이 아닙니다.

생활을 벗어나 도가 없으며 수행이란 없는 것입니다.

진실은 우리 주변의 삶과 세상 속에 있는 사실들이고

진리는 그러한 사실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을 떠나 어디서 진실과 진리를 찾고 어디에서 자신을 농사지을 수 있겠습니까?

영혼이란 삶의 결실이기 때문에 좋은 생활이 곧 도에 이르는 길입니다.

자신의 현실을 좋게 만들고, 영혼을 좋게 만들고, 내세를 좋게 만드는 길이 현실 속에 있는데 다른

곳에서 길을 찾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럼 그냥 보통 사람이 종교에 관심 안갖고 착하게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착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 가장 참된 삶의 길이며 참된 수행법인 것입니다.

영혼의 완성을 이루는 이치는 어디서든 같은 것입니다.

 

성자들이 종교를 배워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자기가 전생에서 지은 좋은 근본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삶을 산 결과

저절로 인간완성의 결실을 이룬 것입니다.

좋은 삶을 살면 자연이 정해놓은 이치에 의해 누구나 다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생활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으면 모든 순간이 수행이 됩니다.

 

깨어있는 정신으로 모든 일의 뜻과 이치를 보고

자신의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어떠한 거짓과 죄를 범하지 않으며

현실에 충실하게 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면

생활이 안정되어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고

사실을 바로보아 옳고 그름을 가려 살아갈 수 있으며

안정된 생활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도 모범이 되어 좋은 생활을 권할 수 있으며

남을 축복하고 세상을 구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으면 항상 마음이 밝고 떳떳하며

성실함과 밝은 정신이 있으면 양심과 용기가 생겨

맑은 정신과 강한 의지로 어떠한 세상 일도 능히 헤쳐가며

세상의 욕망과 사사로움을 벗어난 영혼을 얻어 곧 인간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탈에 이르는 진정한 수행법이며 팔정도의 진수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업이 재물과 지위와 명예에 대한 욕망과 집착입니다.

그리고 이를 충동질하는 것이 자기에 대한 근원적인 갈애입니다.

따라서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공관불교에서는 세상이 실체가 없는 공이며 모든 업이 환에 불과하다고 관념하여

이를 생각만으로 지우려 합니다.

그러나 지독한 업을 지우려면 생각만으로는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

자신 속 깊숙이 켜켜히 쌓여있는, 지독하지만 매우 사사로운 습을 지우기 위해서는

이보다 훨씬 크고 가치있는 세상과 진리에 대한 자각과 사랑과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세상과 진리를 위해 자신을 불사를 수 있다면

자신 속에 사사로운 욕망과 집착이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닫지 못한 자는 자신 속에 진정한 용기와 사랑이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인연을 만나 부지런히 배우고 공덕을 쌓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좋은 근본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진정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큰 사랑과 땅이 꺼져도 움직이지 않을 용기가 있어

자신의 삿된 욕망과 집착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맑은 마음을 얻어 세상을 위해 조금의 흔들림이 없이

모든 것을 이치대로 행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해탈이요, 자유자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완성에 이를 수 있는 큰 근본은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윤회전생을 돌며 진리의 인연으로 선근 공덕을 쌓고 쌓아야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나의 깨달음은 고행이나 명상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전생을 돌며 쌓은

나의 공덕이 이 세상을 덮을 만하여 비로소 이 생에 와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인과법은 한치의 오차가 없으니 요행으로 한 소식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애시당초

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진리의 길을 가며 공덕을 짓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세상에 대한 자비와 사랑, 사심이 없는

맑은 마음과 용기, 진리에 대한 지혜와 열정 등 해탈에 이르는 선근공덕을 얻기 위함인 것입니다.

비록 이 길이 오래 걸리고 험할지라도 이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참된 가치이며 보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길을 찾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근 공덕이 무르익으면 때가 이르러 열매가 저절로 열리듯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닫지 못한 것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근과 공덕이 모자람을 탓하고 더욱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