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종교와 문화` 강의를 듣고(2)(출처:국선도 대학홈페이지)
‘종교와 문화’ 강의를 듣고
향 림
도로에서 학교 입구로 난 길섶에 유채꽃을 비롯해 갖가지 꽃들이 화사한 5월의 봄날을 속삭일 즈음에 약간은 낯설기도한 지난 첫 시간에 이어 기대에 찬 두 번째 강의는 학장님의 환영인사를 시작으로 그 문을 열었다.
오늘은 최동춘 도법원장님께서 회원 두 분과 함께 직접 청강하시러 광주에서 먼 걸음을 해주셔서 강의에 대한 관심이 학교 담장을 넘어갔음을 말해 주었던 것 같다.
학자라는 직업에 엄정함은 필수적이라 여겨질 듯해서 당연히 학문을 한다는 자세에서 기본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없다면 결코 느낄 수 없는 뭔가 진지하고 엄숙함마저 전해지는 강의는 그렇게 거룩함을 떠올리게 하는 울림을 주면서 시작되었다.
학생들이 강의를 듣고 난 후 일주일동안 이해를 깊이 하는 과정에서 생겼었을 수도 있는 문제의식을 돌이켜 확인해보고 아울러 당신의 강의를 되새김질 해 부족하다고 스스로 평가했던 부분을 두 가지로 정리해 챙겨주시는 데서 그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번 강의를 요약해주시는 자상함은 강의의 연속성과 완성도를 한결 높여 주었다. 지난번 강의를 방금 전 1교시에 듣고 연이어 지금 2교시 강의를 받고 있는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로...
특정 종교에 속해 있으면서 겪게 될 심리적 부담감으로 해서 현대인들은 어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성격을 띤 종교적 문화에 경도되어 있고 그런 대표적인 사례가 명상수행과 몸을 통한 수련에 대한 열광이라는 것이다. 곧 정신적인 경험, 종교적인 경험이 공통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몸, 그런 몸을 가지고 하는 명상이나 수행에 대해 열광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혼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하면 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드러난 어떤 영혼의 그림자 같은 것을 보는데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몸이 동서고금의 문화전통에서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지 또 몸을 통해서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었는지, 인간의 몸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에서는 인간의 어떤 면을 드러내려 했었는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종교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굉장히 유용한 통로가 될 것이라 하신다.
서구사회에서 근대이전의 사유방식은 몸으로 표상되는 인간의 욕망을 이성적인 것과 대비해 좀 저열한 것으로 여겼지만 20세기 들어와서 서구철학은 인간 개체가 가지고 있는 몸과 몸의 근원적인 요구를 긍정하고 신체의 욕망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으로 기울어왔다. 그러한 면에서 도교적인 전통은 21세기 인간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고 교수님은 역설하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몸에 대해 어떻게 사유해 왔는가 하는 전통적인 이해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첫째, 몸과 영혼을 이원적으로 보는 견해로서 신의 호흡에 의해서 생겨난 영혼의 우월성이 전제가 되는 것이다. 몸과 영혼은 본질적으로 달라서 영은 영의 세계에 속하고 영의 세계로부터 근원하고 영의 세계로 돌아가고 몸은 지상의 세계에 속하고 죽어도 지상의 세계에 속한다고 보는 것으로 대체적으로 중근동 지방의 셈족의 종교들이 여기에 귀속된다.
둘째로 인간은 축소된 우주라는 것과 우주는 확대된 사람이라고 하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물론 이런 것에도 영혼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혼이 신의 세계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를 이루는 근원적인 물질이나 이 우주를 이루는 근원적인 물질이 근본적으로 같기 때문에 나 죽으면 우주로 돌아가고 우주의 어떤 것이 잠깐 모여 나를 이루기도하고 죽고 나면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것, 따라서 사람은 죽을지 모르지만 우주 속으로 생존해 들어간다는 세계관이다. 한 종교전통 안에서도 이 두 가지는 뒤섞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몸에 대한 관점 중 두 번째 범주에 귀속하는 세계관은 중국에 있어서 수련체계, 의학, 기공양생학, 유가, 도가 이론 등의 기반을 이루게 되었다. 영혼이라는 것도 별개의 것이 아니라 기의 다른 형태라, 제사지내는 경우를 보면 중국인 나름대로 인간의 몸에는 어떤 다른 요소들도 어딘지 모르게 있다고 믿었었고 그렇지만 혼과 백도 결국은 천지의 기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고 인식했다.
이러던 것이 후한 초기쯤에 와서 사후관념이 발달한 인도의 불교가 전해지면서 그 영향을 받아 염라대왕이라든지 죽음의 사자라든지 하는 관념이 스며들게 됐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도교의 것이냐 불교의 것이냐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섞였다는 것이다.
몸이라는 것은 전통사회에서 몸 자체가 인간의 정서라든지 의사표현의 수단이기도 하고 또 그 의미는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전통사회에서의 경우 특히 농경사회의 경우에는 흰머리는 삶의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장례식을 놓고 봐도 전통사회에서는 장례기간을 통해서 한사람의 결핍을 공동체의 조화로운 상태로 인식하게끔 그 기간을 정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죽음을 일단 병원으로 내몰고 어린아이와 임산부는 터부시하고 뭔가 어두운 공간으로 의미지우는 것이다.
또 기가 막힌다든지 하는 식의 기와 관련된 은유나 간이 콩알만 해 졌다든지, 간담이 서늘해졌다든지 하는 식의 신체의 일부를 정서나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대체적으로 모든 문화권에서 신체에서 분비되는 물질에 대해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삼가거나 다른 어떤 은유를 쓴다든가 하며 뭔가 불결하고 점잖지 못한 말이라고 생각을 해왔는데 최근에는 인간의 신체나 욕망에 대한 긍정이 부각되면서 그런 이해도 점차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다 한다.
인류사에 있어서 종교문화를 좌지우지하는 커다란 세계종교들만 가지고 보면 첫째 사유방식은 마니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셈족의 종교전통들에 일관된 것이고 둘째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같은 인도의 종교들의 범주와 불교(중국 불교는 인도에서 건너 왔지만 중국적인 불교를 꽃피웠기 때문에 중국의 종교로 범주화 한다고 함), 도교, 유교 같은 중국적인 범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디언 전통이라든지 소규모 섬에서 누려왔던 문화적 종교전통들도 독자적인 종교전통들로 인정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종교가 갖는 사회적 순기능 이외에 정치와 결합되어 나타난 터무니없는 차별구조나 억압구조의 심각한 폐해 때문에 현대사회에서는 정교분리가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정교분리가 되지 않았을 때 훨씬 더 공동체가 삶 자체를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고 삶의 원리를 분산시키지 않고 종교적인 원칙 하에서 통일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장점은 있다고 하시는 교수님의 기대 섞인 몸에 관한 마무리 말씀은 종교적 체험이 갖는 공동체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도법원장님의 진지한 청강은 어김없이 질문으로 증명을 해 보였다.
중국전통에서 영에 대해서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고, 음양중 어느 것에 속한다고 보아야 하는 가였다. 교수님 왈 영이라고 하는 용어는 선진 문헌에 심심찮게 등장을 하지만 영역이 별개의 근원을 가진 것은 아니고 역시 기의 다른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춘추를 해석한 책인 ‘좌전’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는데 그 일화 중 몇 군데에서 영이라는 개념이 나왔을 뿐이기 때문에 중국고대인들이 영은 반드시 양에 만 속한다고 일반화시키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호흡이라는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학장님도 꼼꼼히 챙기시는 걸 놓치시지는 않으셨다.
몸수련을 함께하는 우리로서 다른 단체보다 국선도가 무조건 우위에 있다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수련단체 가령 명상을 위주로 하는 수련단체하고 우리 국선도와 비교할 적에 뚜렷한 차이는 무엇이고 특징이 있다면 그것의 효과는 무엇이며, 있을 수 있는 우위점들은 어떤 것이 있겠는가에 대한 것을 연구하고 그런 점에서 몸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 몸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그것을 인용한다면 우리의 인식의 지평이 훨씬 넓어지고 아울러 객관성을 견지할 수 있어서 이번 강의가 더욱 더 좋은 자료가 될 것 같다는 말씀이었다.
이런 학장님의 언급은 나로 하여금 국선도가 수련문화 속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제대로 인식하게끔한 교수님의 부연설명을 끌어내 주었다.
차분한 가운데서도 너무도 열띤 강의여서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터에 학장님께서 간신히(?) 얻어낸 짧은 휴식시간은 도법원장님께서 정성스럽게 싸 가져오신 알록달록 갖가지 떡과 과일, 음료, 자유스러운 가운데에서의 학생들의 질문으로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순식간에 지났던 것 같다.
교수님왈 그러한 비교는 도교의 용어로 性命雙修라는 걸로 이해될 수 있다 하셨다. 성은 마음이나 정신에 관한 수련이라 보고 명은 육체적인 수련이라 보는 것이다. 많은 도사들이 유가나 불가가 갖지 못한 이 命에 대한 배려를 도교는 갖고 있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그 우위성을 주장했다는 것이며, 심지어 너희들이 몰라서 그렇지 석가도 노자, 공자, 맹자 등 제자백가들도 사실은 성명쌍수를 했는데 후대에 이 명에 대한 측면이 누락되었고 반면 도교는 바로 그것을 강조한다는 것이라 한다. 언젠가 비슷하게 들은 얘기였던 것 같은데 좀 더 근거를 가지고 그 지역적 연원과 내용을 알게 해준 설명이었다.
도교적 용어로 行功이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한다. 기원후 이 삼백년경 도교이론이 체계화되던 초기에서는 行은 善行을 쌓는 것을 뜻하고 功은 성명쌍수하는 방법을 뜻했다고 한다.
애초에 도교도들은 선행을 쌓는 것도 수련에 있어서 굉장히 필요하고 기본이 되는 것이라 여겼다 한다. 요가 수련에 있어서도 첫째단계, 둘째단계가 다 착한 일을 행하고 나쁜 일은 안하는 것을 수련의 첫째 규율로 여긴 것을 보면 이런 규율이 각 종교의 수련단체에 기본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아주 중요하다 는 말씀이었다.
곧 수련이 사회를 떠나지 않는다는, 인간의 일상생활을 결코 떠날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수련을 왜 하는가에 대한 때때로 드는 의문에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도 하다.
호흡이라는 것은 각 문화권, 모든 종교전통들에서 생명현상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현상 일 뿐만 아니라 그 생명현상을 유지하는데 근본적인 것과 연결시켜주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호흡을 조절하는 다양한 테크닉은 인도에서 훨씬 더 정교하게 발달돼왔던 것 같다고 하신다. 호흡의 테크닉을 가지고 범아일여라는 지상목표에 다가가려는 데서 다양한 호흡의 방식, 수십 가지 되는 숨의 종류, 흡지호지의 비율, 몸은 어떤 자세로 등등의 호흡에 관한 정교한 연구는 인도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나하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는 인도처럼 정교하고 다양하지는 않지만 의학이론과 더불어 호흡에 관한 연구를 나름대로 체계화시켜왔다고 한다.
도교의 호흡 가운데 알고 있어야 할 주요한 개념으로 閉氣와 胎息, 還精補腦라는 것이 있단다. 숨을 닫는다는 폐기는 숨을 거의 안 쉬는 것처럼 깊게 하는 것이고 태식은 폐기를 가장 성공적으로 했을 때 도달하는 그것을 말한단다. 환정보뇌란 정기신에서 정을 돌려서 뇌를 보강한다, 문자 그대로 뇌로 다시 돌려 보낸다는 것이라 하는데 이 환정보뇌는 도교의 커다란 세 흐름 중 당시에는 굉장히 고급스런, 귀족들만 할 수 있는 방중술파에서 많이 언급되는 것인데 호흡수련을 통해서 환정보뇌하는 테크닉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라 한다.
요가와 도교 이외에 비교적 최근에 관심을 갖는 것이 불교의 테라바다 불교 즉 남방불교인데 그중 대표적인 두 가지 전통으로 비파싸나 수행과 티벳불교가 있고 이 두 가지가 지금 전 세계적으로 굉장한 열풍를 일으키고 있다 한다. 그중 특히 비파싸나 전통에서는 가장 중요한 게 호흡이라 한다. 호흡이야말로 내면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한단다.
호흡과 종교적인 수련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요가의 여덟 가지 단계를 살펴보는 것은 여러모로 함축하는 의미가 큰 것 같았다.
첫 번째 두 번째 단계는 앞서 설명하신 도덕적인 통제
세 번째는 육체적인 통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요가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시중에 체조화되어 성행하는 이 요가는 그 성립배경인 힌두교의 신념체계는 빠져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네 번째 단계가 숨을 고르는 단계다. 요가경을 정리한 파탄잘리는 이 단계를 굉장히 중시했다 한다. 프라나는 힌두사상에서 말하는 氣다. 어디에나 충만해 있고 우리 몸에 통과하는 길이 있고 이러한 프라나를 제어하는 단계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 단계는 프라나를 성공적으로 제어함으로써 신체의 不隨意筋을 포함한 우리 몸의 육체적인 감각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다섯 번째 단계가 요가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서구인들이 이러한 제감법을 행하는 요기들을 보면서, 땅속에 며칠 묻어놔도 멀쩡한,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현상들을 보여주는 요기들을 보면서 서구사회에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 단계는 고도의 정신집중을 하는 것이라 한다. 다음 일곱 번째는 무념의 상태에 드는 것이다. 여덟 번째 단계가 바로 사마디, 즉 삼매이다. 삼매란 브라만과 아트만이 완벽하게 합일되는 경지라 한다.
정리해보자면 요가에서의 호흡은 그들이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는 유일하고도 가장 빠른 것이라 생각됐고 그래서 호흡은 첫 번째 두 번째의 도덕적 통제 이외의 모든 단계에서 중요한 근간이 돼왔다는 것이다. 반면 불교명상에서의 호흡은 단순히 깨어있는 것을 돕는 것이지 호흡자체를 갖고 열중하여 축기를 하는 식의 경우는 발견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요가는 인도에서 수행되는 수련체계를 일컫는 특수명사가 아니라 호흡수련을 지칭하는 아니면 인간의 호흡수련 전체를 지칭하는 일반 명사가 됐을 정도로 보편화되고 있다한다.
지금껏 요가와 도교는 호흡이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수련을 체계화시킨 수련체계였다면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다른 종교의 경우는 짧고 간단한 성가를 통한 호흡조절, 짤막하고 반복적인 기도문을 통한 나름대로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호흡 등 그들만의 독특한 발성법을 통한 호흡이 있었을 것 같고 또 이슬람의 수피들처럼 춤을 통한 독특한 호흡방식도 의도적이든 혹은 의도적이지 않든 종교적인 수련에 호흡방식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는 교수님의 견해는, 열려있는 시야를 유지한다면 보기 힘든 것도 어렵지 않게 간취해낼 수 있다는 교훈을 새겨주었다.
호흡에 대해서 우물 안에서 간단하게만 생각해 왔던 그간의 짧은 생각이 일거에 트이는 강의였다. 궁극적인 것과 하나가 되기 위한 내면수양에 몸이라는 것과 호흡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했었고 세계 각 지역에서 각각의 역사적, 문화적인 특수성을 갖고서 나름대로의 체계를 이루어온 모습 속에서 제각각이 다 아름다운 심성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새기게 한 시간이었다.